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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E - 내일 또 보자(nightcore)(またあした) ]

프로그램 속에서의 히나타는 더할나위 없을 정도로 코마에다에게 친절했다. 마치 그를 위해 태어나고 자라온 것처럼 앞길을 비추고 나아가는 등불이었다. 아무리 밀어내고 외면해도 그는 절대 코마에다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에노시마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망가진 수학여행에서도 그랬고, 복구한 뒤 이어진 아일랜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히나타 하지메는 아무런 재능이 없는 예비학과였고, 희망이었다. 코마에다 나기토가 그렇게 원하고 좆던 존재가 눈 앞에 있었다. 처음에는 멸시와 조롱 속에서 움츠렸지만 끝내 완전히 개화한 꽃이었다. 그토록 꿈에서조차 허상같이 따라붙던 것을 앞에 두고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

 

  조금만 참고 버텨냈다면 어렵지 않게 이끌릴 수 있었던 안정된 활로를 제 발로 걷어찼다. 전부 다 어리석은 생각에서 비롯된 오류였다. 히나타에게서 희망을 얻고 미래를 본 생존자들은 프로그램에서 탈출했다. 밖으로 나간 그들이 보게 될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그들이 부러웠다.

 

  단순히 정이었는지 애착이었는지, 비슷하지만 다른 이름을 한 연민이나 동정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히나타는 프로그램을 나간 후에도 남은 클래스 메이트들을 깨우기 위해 섬에 남았다. 그리고 그 결과, 감염된 프로그램을 복구하고 원래대로의 아일랜드를 재생했다. 나나미와 우사미는 없었다. 새로운 감시자 역은 히나타, 본인이었다.

 

  아일랜드에서는 참 머저리같이 굴었다. 그곳에서의 코마에다는 히나타가 예비 학과라는 사실을 몰랐고, 또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동등한 입장에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며 그에게 끌려다니기만 했다. 지금껏 남의 관심과 애정을 쳐내기에 바빴다. 그러기에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구한 사랑이었다.

 

  거짐 초면이나 다름없었지만 히나타가 보여주는 감정의 깊이가 남달라서, 무심코 빠져들어버린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애초부터 코마에다를 깨울 목적이었으니까 그렇게 다정하게 굴었던 거다. 조금 배신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리 아웃사이더인 그라고 해도 존재하는 이상 마냥 버려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랑 친구가 되어줄래…?"

 

  마주 잡은 손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약간의 굳은살이 박혀 오돌토돌한 표면을 부볐다. 먼저 손을 내밀기는 했지만 악수는 익숙하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슬금슬금 빼려 했지만 히나타 쪽에서 세게 붙잡는 바람에 불가능했다. 그는 평범했다. 능력이 특출나지도 않았고,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았다.

 

  분명 코마에다가 히나타에게서 매력을 느낄만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었을 텐데, 석양 지는 하늘을 등진 미소는 그림같이 눈부셨다. 암초에 가려지고 수면에 반사된 빛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지나친 반짝임에 몇 번이고 시야가 굴곡졌다. 움찔거리며 마주 잡은 손을 뒤틀었다. 그가 주는 힘만큼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압력이 가해졌다. 갑작스럽게 코마에다가 힘을 주자 히나타의 미간이 찌푸렸다. 당황한 표정을 보자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것도 아닌 이런 행위에 약간의 홀가분함까지 느껴졌다. 주홍색의 색채에 덧칠된 얼굴을 훔쳐보다가 그냥 눈꺼풀을 닫아버렸다.

 

  밝은 빛에 눈동자가 따끔거렸다. 쓰린 눈가를 문질렀다. 손가락에 축축한 물기가 닿았다. 눈물샘을 비집고 나온 물기는 손가락의 갈라진 틈새로 스며들었다.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서 잡히지 않은 소매로 눈을 비벼 닦았다. 은근 장난스러운 히나타의 성격대로라면 분명 놀려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북받치는 감정을 눌러 담았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히나타를 올려다봤다. 이제는 방향을 비튼 직사광선 탓에 표정 하나 읽기가 어려웠다. 하나만은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전까지 머금고 있던 자애로운 미소가 온데간데없었다. 은근하게 읽히는 분위기는 오히려 조금 놀란 것처럼 느껴졌다.

 

  의외의 면모에 자존심도 잊고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히나타가 화들짝 놀라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뒤늦게 코마에다의 말에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다음의 일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프로그램에서 깨어나는 동안 발생한 약간의 에러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송두리째 없어진 기억을 되짚으려 노력했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저 졸업을 했겠구나,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일어난 후는 딱히 설명할 정도로 중대한 일이 있지 않았다. 캡슐 안에서 있었던 탓에 현저히 허약해진 몸을 히나타가 업어들고 이동했다. 군살 없는 등에 기대어 잠깐 졸았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적적하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곁에는 언제나처럼 그가 있었다.

 

  코마에다가 누워있는 병실 옆의 의자는 항상 히나타의 차지였다. 가끔 방문객들이 한 번씩 앉았다 가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처럼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지는 않았다. 살육 수학여행의 기억이 남아 그를 껄끄러워하는 것에 가까웠다. 인사치레로 간단한 말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대다수의 시간을 독서하는 것으로 보냈다. 머리맡에는 항상 책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코마에다가 자주 읽는 책들이었다. 종류부터 취향까지, 전부 그의 것에 가까웠다.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히나타였다.

 

  히나타는 언제든지 코마에다의 숙소에 찾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살육 수학여행에서도 그랬고, 아일랜드의 코티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실제로도 그 사람이 살아온 생이 그대로 반영되어있는 숙소에서 책장을 뒤졌을 것이다. 과거가 적혀있는 파이널 데드 룸의 특전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는 와중에 알게 된 것일 테다.

 

  한참을 뚫어져라 활자를 훑고 있으려니 망막이 시렸다. 바둑돌 같은 검은 글자들이 한결같이 이지러졌다.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기 위해 눈에 힘을 주다가 결국 포기하고 책을 덮었다. 깊은 한숨을 몰아쉬기가 무섭게 수저가 들이밀어졌다.

 

  "…싫어."

 

  거절의 의미를 담아 도리질 쳤지만 한 번 뜻을 관철한 수저는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깨어있었던 건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팔을 들어 물리는 것도 귀찮아 모른척하고 미끄러지듯 이불에 파고들었다. 등을 돌리고 자리에 드러누워버리자 뻗어온 팔이 억지로 몸을 뒤집었다.

 

  "안돼."

 

  애써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자 일자로 열을 맞춘 눈썹이 보였다. 히나타가 굳건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고집스러운 표정은 최근에 하도 많이 봐서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먹고 자."

 

  불필요하고 성가신 친절이었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거짓된 말로 애써 자위했다. 상냥함이라는 것은 허황되고 놓치기 쉬운 이름이었다.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러자 어깨를 부여잡은 손이 거짓말처럼 떨어져 나갔다.

 

  어제는 죽이더니 제대로 받아먹지 않자 스프를 가져왔다. 구수한 맛이 나는 옥수수 스프였다. 작고 물컹한 알갱이가 이에 씹혔다. 나쁘지 않게 좋아하는 종류다. 이것 역시 책과 비슷한 방법으로 알아냈을 것이다. 히나타가 퍼다 나르는 족족 삼키다가 어느 순간 수저를 이로 꽉 깨물었다.

 

  히나타는 빠지지 않는 수저를 빼내려고 흔들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알겠어. 이제 자도 돼."

  "응."

 

  말을 꺼내기 무섭게 물고 있던 수저를 놓고 늘어져 눈을 감았다. 히나타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하다못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었다. 옆자리의 협탁에 반쯤 빈 그릇을 내려놓은 그는 가까이 다가와 흘러내린 이불을 단단히 덮어줬다.

 

  베개에 올린 손등을 차가운 손바닥이 감싸 안았다. 내내 병실에 있는 코마에다와는 달리 물건을 가지러 안팎을 수십 번 드나든 히나타의 손은 차가웠다. 질끈 감긴 눈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그는 이름을 부르는 법도 없이 그냥 가만히 손등을 쓸어내렸을 뿐이다.

 

  손가락에 손가락이 얽혔다. 바짝 긴장해 굳은 마디를 부드럽게 문질러 풀어주며 여자의 손마냥 보들보들한 살결을 어루만졌다. 절망이었던 시절, 에노시마의 팔을 이식한 왼팔이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감각이 없었다. 신경까지는 미처 연결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오로지 팔목에 닿는 온기만으로 감각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계속해서 민감한 왼손을 만지는 것에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안정된 이후에도 절망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 손만은 여직 희망의 손길을 무의식적으로 도피하고 있었다.

 

  한낱 꿈처럼 치부하며 애써 잡생각에 빠져들었다. 요 며칠간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생활을 하다 보니 그렇게 자고도 용케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푸릇한 싹이 지고, 무더운 태양이 높게 떴다. 주인 없는 병실에는 열린 창문을 타고 미풍이 불어 들어왔다. 파고든 바람은 장막처럼 드리운 커튼을 온통 뒤집어놓았다. 코마에다는 언제까지 병실에 머물 수는 없어 일찍이 퇴원했다. 몇 년이나 몸을 사용하지 않았던 탓에 아직도 걸어 다니는 게 어색했지만 그럭저럭 돌아다닐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자택으로 돌아갔다. 키보가미네 학원에 들어가고 절망이 되고, 신세계 프로그램에 접속했다. 자리를 비운 시간을 따지면 고작 이삼 년 정도로 따질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꽤 열심히 가꾸던 정원에는 갈잎색 담쟁이덩굴이 얼기설기 엉켜있었다. 옛날이라면 당장 펜치라도 들고 나와 정돈하려 들었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원을 지나쳐 현관으로 근접했다. 비밀번호는 까먹은 지 오래였다. 열쇠 또한 잃어버렸다. 하지만 미리 스페어 키를 준비해놨다. 정확히는 코마에다가 준비한 게 아니라 가기 전에 히나타가 억지로 손에 쥐여준 거였다. 히나타는 이따금씩 그를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나 치매 걸린 노인쯤으로 취급할 때가 있었다. 그것이 못내 기분 나빴다.

 

  열쇠를 꽂고 무심코 왼쪽으로 돌렸다가 걸리는 잠금쇠에 재빨리 오른쪽으로 돌렸다. 힘을 줘 당기자 고생시키지 않고 바로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들어선 집은 엉망이었다. 당연하지만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았던 탓에 곳곳에 매캐하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꽉 막힌 공기에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창을 열고 환기부터 했다. 그다음부터는 어떻게든 쌓인 짐을 차곡차곡 정리해보려 했지만 역시 힘들었다.

 

  생각 이상으로 잡다하게 쌓인 물건들이 많았다. 결국 하나도 정리하지 못하고 한쪽 귀퉁이에 몰아놓기만 했다. 산만하게 어질러진 물건들을 보며 한탄을 쏟다가 소파에 웅크려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찌덥는 더위가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온통 붉고 노랗게 물든 잎사귀들이 털갈이를 하듯 우수수 쏟아졌다. 떨어진 낙엽 위를 밟자 마른 잎들이 사박거리며 부스러졌다. 미래 기관에서 일을 시작했다. 딱히 중요 직책은 아니었다. 과거 절망이었던 남자에게 핵심적인 일을 맡길 사람은 상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로는 히나타의 일을 돕는 것이었다. 코마에다는 아직도 그가 껄끄러웠지만 주제에 의견을 피력하는 것도 우습게 느껴져 얌전히 상부의 결정에 따랐다. 오랜만에 만난 히나타는 여전했다. 여전히 우직하고 당당했으며, 쓸데없이 친절했다.

 

  "같이 살자, 코마에다."

 

  바닥에는 수많은 책들이 등을 보이고 엎어져있었다. 수북이 쌓인 짐을 피해 빙 둘러온 히나타가 손을 내밀었다. 아일랜드와는 반대였다. 그때는 코마에다가 먼저 용기를 내 손을 내밀었었다. 흐릿한 등잔 아래서 멍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프로그램 속에서 그가 그랬듯 손을 마주 잡았다.

 

  갈변한 풀들이 찬 바람에 흩날렸다. 여태껏 걸치던 얇은 코트를 두꺼운 모직으로 바꿔 입었다. 일찍이 철새들도 떠났는데 저 혼자 따뜻한 온기를 잊지 못한 건지 철딱서니 없게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있었다. 입김으로 불자 서늘한 공기를 타고 멀리로 산개해 날아갔다. 꼭 연을 날리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히나타가 감아준 목도리는 직접 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많은 재능을 가진 주제에 뜨개질하는 솜씨만큼은 끝내주게 서툴렀다. 여기저기 올이 튿어진 실 틈새를 손톱으로 헤집었다. 새하얀 입김이 허공에 눈처럼 흩뿌렸다. 동그랗게 뭉쳤다가 뿌옇게 떨어지는 점을 바라봤다. 경사진 언덕길을 올랐다. 히나타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는 해가 언덕 너머로 자그마하게 비췄다. 지금껏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던 것과는 전연 다른 크기에 느린 걸음을 재촉했다. 시멘트로 범벅된 회색 도시가 오렌지색의 노을로 물들었다. 물에 탄 세피아 물감을 흘린 것처럼 천천히 색이 번졌다. 짙은 갈색에서부터 주홍빛까지, 어둠을 감지한 가로등의 불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느른하게 덧칠해가는 불빛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한두 번씩 멈춰 서 뒤를 돌아볼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느린 걸음이나마 꾸준히 걸었다. 프로그램에 완전히 적응한 머리는 열대가 아닌 색다른 계절을 신기하게 받아들였다. 코 끝이 발갛게 어는 찬 공기도, 귀가 불그죽죽하게 달아오르는 칼바람도, 하나같이 익숙하지 않은 것 투성이었다.

 

  여섯시가 채 되기 전에 어둑하게 저무는 해도 마찬가지였다. 언덕 너머로 고개를 숨기는 해가 가장 가까운 곳, 길을 물들여가는 노을이 있는 지점에는 히나타가 코마에다를 기다리고 있었다. 휘몰아친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목덜미를 감싼 털 뭉치를 오른손으로 꼭 붙잡았다.

 

  왼손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절망에서 멀어지자는 의미로 잘라버린지 오래였다. 대신 소우다에게 부탁해 새로운 지지대가 되어줄 의수를 제작 중이라고 했다. 휘날리는 옷자락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아무도 없는 병실의 커튼처럼 코트를 잔뜩 뒤집었다. 우둘투둘한 비포장도로의 끝에서 코마에다는 히나타에게 손을 건넸다.

 

  "줄곧 기다렸어."

 

  아직도 아일랜드의 여름잠에 빠진 느낌이었다. 눈꼬리를 접으며 웃을 때면 히나타는 평소와는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고는 했다. 강한 악력을 가진 손아귀가 내민 손을 틀어쥐었다. 가볍게 당겨졌다. 서로에게 의지하듯 두 손을 마주 잡고 익어가는 길을 걸었다. 가로등의 백열광이 무방비한 정수리 위로 내리쬐었다.

 

  까마득한 옛날, 의사는 코마에다에게 시한부 인생을 선고했다. 그는 읽고 있던 동화책의 모서리를 접었다. 모든 것이 언젠가는 끝이 날 이야기지만 한 남자의 이야기는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먼저 끝을 내게 될 것이다.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굳이 읽고 싶지는 않았다.

 

  프로그램에서 깨어난 것은 차라리 행운보다는 불행에 가까웠다. 히나타가 일깨워준 가능성을 가지고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코마에다는 이미 눈을 떠버렸고 에러로 인해 모든 기억을 되찾게 되었다. 이전부터 줄곧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반복되는 행운과 불행에 휘말리며 살 수밖에 없었다.

 

  히나타는 불안해하는 코마에다의 곁에 남았다. 어린아이들이 흔히 그러듯 깨지지 않는 맹세를 다짐하며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겨울이 돼서 그런지 꽃들이 많이 시들었어. 오늘은 함께 정원을 정리하자. 저녁으로는 따뜻한 스튜를 먹고 앞 동네를 조금만 산책하다 들어오는 거야."

 

  하나뿐인 손이 붙잡히자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말없이 경청하고 있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히나타가 이번에는 약지를 얽었다.

 

  "내일 아침은 간단하게 토스트로 때우고 소우다한테 찾아가자. 의수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하더라고. 아마 내일쯤이면 무사히 받아볼 수 있을 거야."

 

  길쭉한 중지가 얽혔다.

 

  "모레는 미오다와 사이온지의 공연을 보러 가자. 미리 표를 받아놨어. 점심은 공연 전에 짬날때 대충이라도 다 같이 먹는 거야. 아마 규카츠를 먹지 않을까 싶은데, 괜찮지?"

 

  힘 없이 아래로 쳐진 검지를 엄지로 받치며 고집스럽게 얽었다.

 

  "음……. 글쎄, 뭘 할까? 뭐 하고 싶은 일 있어?"

 

  짧게 끊어지는 웃음과 함께 도장을 눌러찍듯 엄지 부벼졌다. 맨도롬한 지문이 문대졌다.

 

  "일단 나는 내년 1일에는 꼭 너랑 같이 신사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다정한 목소리는 탁자 위에 진열된 액자를 일렬로 늘어뜨렸다. 어찌나 사진을 남기는 것에 집착하던지 히나타가 코마에다를 붙잡고 억지로 찍은 것들이었다. 기관에서 코이즈미에게 부탁하고, 놀이공원에서 놀러 온 사람들에게 간청하고, 동물원에서 토끼에게 풀 따위를 주던 사람들을 붙잡았다.

 

  "되도록이면 내후년에도, 아니. 매년마다 그러고 싶어."

 

  영화관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지나가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을 때는 조금 이상한 시선까지 받아버렸다. 그래도 히나타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설계하는 미래에는 항상 코마에다가 함께였다. 개별로 두는 일은 결코 상상하지 않았다. 언제나 함께할 거라는 가정하에 내미는 제안들이 하나같이 즐거운 일들뿐이라 되려 불길하게까지 여겨졌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코마에다는 망설였지만 이내 떨어져 나가는 히나타의 손가락에 제 것을 얽었다.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돌리고 작게 끄덕였으나 미세한 움직임을 눈치챈 건지 히나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자리했다. 크게 함박웃음을 터뜨린 그가 와락 끌어안아와서 그대로 침대에 뒤로 자빠져 버렸다.

 

  연신 기쁘다고 주문처럼 되뇌는 히나타의 뒤통수를 어설프게 매만졌다. 아직 죽기 전에 해야 할 버킷리스트는 마저 작성되지 않았다. 내일은 아마 그와 상의해서 텅 빈 리스트를 차곡차곡 채워 갈 것이다. 그리고 굵직한 형광펜을 들고 하나씩 밑줄 쳐 지워나갈 것이다. 지금은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Danganronpa 3 Despair Ar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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