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ain (SID)]
꿈을 꾸었다. 달콤한 단잠이나 따스한 꿈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칠흑으로 뒤덮인 하늘 아래, 아주 오랫동안 차가운 비를 퍼붓는 꿈이었다. 물줄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끝도 없이 나를 괴롭혔다. 바짓자락은 고인 흙탕물에 튀겨 갈색빛이 섞였고, 와이셔츠는 착 달라붙은 채 내 몸의 온기를 사정없이 빼앗아갔다. 빗물은 턱에서 나의 넋을 붙잡고 뚝뚝 떨어졌다.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 때문에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칼을 옆으로 넘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멍 뚫린 하늘은 내게 사정 없이 퍼부었다. '왜 하필 나에게 퍼붓는가'라는 의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그것을 깨닫는다고 한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시시하게도 말이다.
도피처도 없이, 비를 피할 수도 없이, 비는 언제 그칠까 한탄하는 일도 지쳤다. 아침은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았다. 친근함이나 따스함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차가운 세상이 내게 선물해준 '고립'과 함께 쓸쓸히 눈을 감았다. 검은색으로 얼룩진 암흑이 나를 반겨주었다.
"히나타 군."
시야가 다시 되돌아왔다. 내 눈이 번뜩인 것과 함께, 어느순간 내게 퍼붓는 비가 멈추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직 비는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자가 나를 가려주었다. 우산이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뒤를 향해 돌아보았다.
분홍색 단발머리의 한 쪽에 가지런히 꽂힌 게임도트 우주선 모양의 머리핀이 물기 흐린 눈에 비친다. 우산손잡이를 쥐고 있는 하얀 피부의 손이 보였다. 그 다음으로 시선이 움직인 곳은, 친숙한 그녀의 눈동자였다.
"나나미......?"
나나미는 내게로 걸어와 와락 안았다. 우산을 놓지 않은 채, 두 팔로 나를 감쌌다. 갑작스러운 나나미의 돌발행동에 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처음 몇 초간은 당황하며 아무런 말도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나나미를 말리지 않았다. 거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따스했다. 나나미의 온기가 빗속에 고립되었던 나를 채워주었다. 희망을 불어주었다. 나나미의 온기 덕분일까. 내 눈시울마저 뜨겁게 끓기 시작했다.
"나나미......"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나미의 이름을 불렀다. 어째서일까,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이 저려왔다. 그럼에도 계속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나나미."라고 직접 소리내어 부르고 싶었다. 그리고 내 목소리에 반응하는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냥 그 정도면 충분했다. 더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안녕, 히나타 군."
나나미의 갈등 섞인 목소리는 어째선지 흐느끼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아니, 그게 마냥 착각에 불과했을까. 나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
"나나미, 여긴 어쩐 일이야?"
"그리고 안녕......"
예고 없는 작별 인사가 마음을 철령였다. 불안한 감각이 솟아났다. 익숙하지만 혐오스러운 그 감각이었다. 숨이 벅차오르며 다시 한 번 나나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나미는 없었다. 나를 안고 있던 감촉마저 사라진 채, 우산은 덩그러니 뒤집혀 젖은 땅바닥을 뒹굴었다. 환상이 취해있었던 기분이다. 행복해하게 해주던 환상은 사라지고 악몽이 시작되었다. 비는 더욱 거세지고 세상은 흑백으로 변했다.
모든 게 시시해졌다. 행복한 환상에서 깨어나 악몽으로 접어든 장발의 머릿결을 철렁이며 진흙이 되어버린 길을 걸었다. 비에 젖어 차가워진 검은색 정장은 다시 내 체온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동요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듯이, 아무런 감흥 없이. 말버릇처럼 "시시하군."이라는 말을 굴리며 걸었다. 고작 그 정도 따스함이 희망이었던가. 고작 이 정도 허무함이 절망이었던가. 모든 것이 시시하다. 계산 안의 시시함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게 흥미를 주는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뺨을 더듬어보았다. 상처는 흉터도 없이 사라졌지만, 오래 전 절망으로 죽어가던 남학생의 총알 한 발이 이 뺨을 스쳐지나갔다. 절망이 내 예상을 빗겨나갔다는 것을 증명해준, 절망의 흔적이었다. 그 총알은 '나조차 예기치 못했다'. 이윽고 뺨을 더듬던 손은 주머니를 뒤져 물건을 꺼내본다. 희망이 내 예상을 빗겨나갔다는 것을 증명해준, 희망의 흔적이 붉은 눈동자에 비친다. 곧 '나조차 예기치 못한' 눈물을 흘렸던 과거가 떠오른다.
게임도트 우주선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희망과 절망. 과연 어느 쪽이 더욱 변칙적인가. 내게 흥미를 가져다줄 것인가. 피로 젖은 손으로 머리핀을 꽉 쥐며, 느린 보폭으로 빗세례를 뚫고 덤덤하게 지나갔다. 탁한 그림자가 내 발목을 잠식했고, 절망으로 물든 세상 속에서 허무 사이로 반짝이는 흥미만을 쫓았다.
마침내 나는 마침내 악몽에서도 깨어났다.
밤새 비가 온 모양이었다. 노란 동이 트자 세상의 물방울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반짝였다. 긴 밤이 지나 내게 비추는 햇살은 오늘따라 따뜻했다. 잔잔해진 물 웅덩이는 내 모습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장발은 다시 짧은 머리칼이 되었고, 눈은 오드아이가 되어 있었다.
햇살의 따뜻함을 만긱하던 도중, 나는 머리핀이 생각나 꺼내들었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핀 역시 태양에 빛추어 반짝였다. 나는 여지껏 이것을 희망의 징표라고 생각해왔었다. 과거 내게 웃어주고 조언해준 어떤 여자아이의 '과거'가 담긴 희망의 징표라고. 그러다 나는 문득 생각이 들어다. '과거' 때문에 '다음'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그래, 나나미가 내게 불어준 것은 '미래'였다. 희망도 절망도 모두 받아들인 '미래'. 예비학과 시절의 나와 카무쿠라 시절의 나를 전부 받아들이고, 나는 미래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이 머리핀은 미래의 징표다. 앞으로 나는 미래로 향한다. 굳게 다짐한 나는 미소지으며 본격적인 아침을 맞이했다.
